단순한 숫자 놀음을 넘어 실질적인 주행 효율과 조립 완성도를 끌어올린 이번 신차는 상급 모델의 존재 이유를 위협하며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름표에서 뺀 숫자만큼 채워진 성능, 역설적인 진화의 시작

자동차 업계에서 모델명의 숫자가 낮아진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성능의 하락이나 사양의 축소를 의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026년형 메르세데스-벤츠 EQE320+ SUV는 이러한 관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역설적인 진화를 보여준다. 기존 EQE350+라는 이름을 버리고 더 낮은 숫자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보닛 아래 숨겨진 전기 모터의 역량은 오히려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는 마케팅 수치에 집착하기보다 실질적인 사용자 경험에 집중하겠다는 브랜드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후륜에 배치된 싱글 모터 시스템은 이제 최고 출력 315마력을 발휘하며, 이는 이전 모델 대비 27마력이나 상승한 수치다. 최대 토크는 417lb-ft 수준을 유지하며 전기차 특유의 즉각적인 가속감을 보장한다. 단순히 힘만 세진 것이 아니다. 이번 연식 변경을 통해 테슬라의 슈퍼차저 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있는 NACS 어댑터가 기본 제공되면서, 전기차 운용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충전 편의성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하드웨어의 미세한 조정과 소프트웨어의 최적화를 통해 엔트리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상급 모델인 500 시리즈나 AMG 라인업이 부럽지 않은 실용적 구성을 갖추게 된 모습이다.
트랙에서 증명된 내실, 수치 너머의 주행 질감을 분석하다

출력의 상승이 반드시 기록의 단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EQE320+ SUV가 보여준 트랙 데이터는 이 차의 성격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60마일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5.7초로 이전 세대와 동일한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쿼터마일 구간을 통과하는 속도와 시간에서 미세한 향상이 관찰되는 것은 중고속 영역에서의 추월 가속 성능이 한층 끈기 있게 변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제동 성능의 비약적인 향상이다. 시속 60마일에서 완전히 멈춰 서기까지 필요한 거리가 기존보다 약 3미터 이상 단축된 111피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타이어 선정과 브레이크 시스템의 조화가 정점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지표다.
실제 도로 위에서 느껴지는 주행 질감은 벤츠 특유의 안락함이 지배적이다. 싱글 모터 특유의 매끄러운 토크 전달은 복잡한 도심 주행에서 운전자의 스트레스를 최소화한다. 사륜구동 모델인 4Matic이 제공하는 강력한 접지력도 매력적이지만, 일반적인 온로드 주행 환경이라면 후륜구동 모델의 경쾌한 회전 감각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회생 제동 시스템의 단계별 설정 역시 정교하게 다듬어져, 원페달 드라이빙 모드에서는 브레이크 페달에 발을 올릴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감속이 이뤄진다. 다만, 물리 브레이크 페달을 직접 밟았을 때 느껴지는 초반의 모호한 답력과 이질감은 차세대 모델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조밀해진 조립 품질과 여전히 난해한 공간 설계의 공존
강점 요소:
- 한층 견고해진 실내 마감과 잡소리 억제 능력
- 후륜 조향 시스템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회전 반경
- 실제 주행 거리 확보에 유리한 에너지 효율성
약점 요소:
- 공기역학에 매몰되어 개성을 잃어버린 외관 디자인
- 두꺼운 A필러와 높은 대시보드가 만드는 폐쇄적인 시야
- 동급 경쟁 모델 대비 여전히 아쉬운 충전 속도
섀시 기술의 정점과 사용자 경험이 마주한 명암
이번 시승차에 탑재된 후륜 조향 시스템은 대형 SUV의 물리적 한계를 지워버리는 핵심 기술이다. 좁은 골목길이나 유턴 구간에서 발휘되는 민첩성은 콤팩트 해치백을 운전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고속 주행 시에는 차선 변경의 안정성을 높여주지만, 때때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여 차체의 움직임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경향도 관찰된다. 이를 보완하는 에어 서스펜션은 노면의 잔진동을 세련되게 걸러내며, 프리미엄 럭셔리 SUV가 갖춰야 할 품격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실내로 들어서면 벤츠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던 조립 품질의 개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전 모델에서 간혹 들리던 내장재의 삐걱거림이나 플라스틱 소재의 유격은 이번 2026년형에 들어서며 완벽에 가깝게 수정됐다. 손이 닿는 모든 곳의 질감이 견고해졌으며, 소재의 고급화 전략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모습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한계는 여전하다.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극단적으로 눕힌 윈드실드와 거대한 A필러는 운전자의 전측방 시야를 심각하게 방해한다. 또한, 화려함만을 강조한 하이퍼스크린보다는 기본형 터치스크린과 헤드업 디스플레이의 조합이 실제 운전 집중도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라는 점은 구매자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대목이다.
냉혹한 시장의 평가, 기본형의 가치가 생존의 열쇠가 될까
98kWh급 배터리 팩을 탑재한 EQE320+ SUV는 실제 고속도로 주행 테스트에서 약 434km(270마일)의 주행 거리를 기록했다. 이는 공식 인증 거리보다는 다소 낮지만, 영하의 기온이나 가혹한 주행 조건을 고려하면 수긍할 만한 효율이다. 다만, 최대 170kW에 불과한 충전 속도는 800V 시스템을 앞세운 경쟁 모델들에 비해 확연히 뒤처지는 지점이다. 15분 충전으로 약 167km를 주행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장거리 이동이 잦은 사용자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수치다.
결론적으로 메르세데스-벤츠 EQE320+ SUV는 브랜드의 이름값에 걸맞은 럭셔리함과 한층 성숙해진 완성도를 갖췄다. 기본 모델만으로도 충분한 출력을 확보했으며, 불필요한 상급 트림의 유혹을 뿌리치기에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전기차 기술의 진보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현재, 벤츠의 이 미드사이즈 SUV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디자인적 호불호와 효율성 논란을 잠재울 만큼의 브랜드 파워가 여전히 유효할지, 아니면 곧 출시될 차세대 GLC EV의 그늘에 가려질지는 소비자의 냉정한 선택에 달려 있다. 가장 합리적인 벤츠 전기차라는 타이틀은 얻었을지언정, 시장 전체를 압도하기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매듭이 많아 보인다.